사람을 감동시키는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인가?
작가의 처한 현실과 내면의 세계가 담겨져 작품으로 표현한 결과물은 위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은 위기에서 깨어난다는 말이 있다. 그중 전쟁은 인간이 겪는 가장 침혹한 비극 중의 하나이다. 동시에 이를 배경으로 훌륭한 예술가가 출현하기도 한다. 근대 시기의 많은 작가들은 이러한 시기를 경험하였다.
이중섭만큼 우리의 가슴속에 그의 삶과 예술이 깊게 각인된 작가도 드물겠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미군정의 시기, 좌우익의 대립, 전후 복구라는 고난과 시련의 격동기를 전적으로 느끼고 살다 간 그은 온전한 삶 자체가 예술이고 그 안에 녹아들어 간 작업이 전부였다.
이중섭은 월남 이후 한 곳에 정착을 못하고 유랑민처럼 떠도는 삶을 살았고, 그의 유일한 삶의 위안은 그림이였다. 피난 생활과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 삶은 그 자체가 투쟁이고 존재의 이유였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제작의 어려움이나 재료의 빈곤을 탓하지 않고 틈만 나면 재료를 불문하여 아무 데나 그렸다. 이런 이유가 그의 작품 대다수가 그림을 위한 밑그림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유이다. 작업 조건이 열악한 가운데서도 종이의 양면을 이용하여 그린 작업들은 얼마나 그가 치열하게 그림에 몰두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중섭은 40여 년의 짧은 생애 기간 동안 수백여 점에 달하는 작품들을 제작하였고 그중에서는 연필, 소묘, 엽서화, 은지화와 편지화, 스케치화, 삽화 등이 다수 포함되어있다. 비록 습작처럼 그려져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지만 유채화와 연필 소묘, 엽서화, 은지화, 편지화 등 생활 속의 드로잉을 그의 주요 작품으로 평가한다.
시대적 생활 속의 모습이나 독창적인 기법은 그의 예술적 열정을 대변한다. 그의 가족사에서, 생활고로 일본으로 보낸 아내와 두 아들과 북에 두고 온 어머니를 유난히 그리워했고, 그리움은 그의 병의 원인이 되었다. 그의 살아가는 생애의 소품들은 그리움의 편린들로 가득 채워져 있음이 느껴진다.
생활 속의 드로잉-엽서화와 은지화, 편지화
작가 생전에 이중섭과의 절친인 시인 구상은 이중섭에 관해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 더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잣집 골방에서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포집 목로주점에서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면 합판이나 맨 종이, 담뱃갑 은지네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곳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을 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라고 이중섭에 대해 자세하게 중언하였다. 이중섭의 삶이 온전히 녹아있는 작업의 열정이 예술 그 자체임을 말해주는 증언이다. 그는 드로잉 속에 그의 순간의 모든 사고와 감정을 아낌없이 솔직하게 모든 열정을 쏟았다.
그의 독자적인 드로잉은 현대미술사상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형식임에 틀림없다. 그의 초기 시기인 일제 강점기와 일본 유학시절의 작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해방 이전의 엽서 화가 상당수 남아있다. 1940년 말에서 1943년 해방 이전 당시 일본에서 통용되고 있는 조그만 관제엽서를 이용한 엽서화는 그가 일본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머물던 당시 그의 연인 야마모토 마사코(국명 이덕남)에게 보낸 엽서 그림들이다. 이는 마사코를 향한 사랑의 연작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일상의 감정을 예술의 형식으로 승화시켰다.
전쟁 중에서도 이중섭은 담뱃값 속 종이를 이용하여 그의 고유한 은지화를 작업하였다. 피난시절의 재료의 부족으로 대체재로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지만 에칭(동판화)과 같은 은지에서의 고유한 느낌은 훌륭한 표현 수단으로 바뀌었다.
생활 속의 발견으로 작업한 종류로는 일본 유학 시절 엽서화에서 시작되어 은지화, 그리고 생활고로 헤어진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화로 이어진다. 이러한 대체재라 할 수 있는 오브제의 발견은 단순한 재료의 빈곤이나 우연의 결과가 아닌 생활주변의 매체들을 예술적으로 활용하려는 관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전쟁통의 난국이였지만 전쟁이 가져다준 비극과 가난이 없었다면 과연 이러한 예술형식이 창안될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지만 이중섭은 이러한 현실의 세계를 극복하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1950년대 당시 매우 드물게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은지화 3점이 소장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독창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1952년 생활고로 떨어져 지낸 부인과 두 아들에 대한 그리움도 그의 드로잉에 많이 등장한다. 대부분의 은지화를 보면 전쟁의 어두운 모습은 없고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신체를 접촉하며 서로의 유대감과 친밀성을 보여주는 드로잉들이다. 가족에 대한 강한 애착이 보여지고 또한 그의 드로잉 속에는 물고기, 게와 새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가족들과 서귀포에서 함께 생활한 행복했던 기억들을 표현한 것이다.
이중섭은 현실적으로 충족되지 않는 자기의 소망과 욕망을 공상의 드로잉 속에서 만족하고자 하였다. 상실과 고난의 시대에 가족과의 재회, 회상, 그리움을 주변의 일상적이 매체를 활용하여 그의 고독과 외로움을 달랜 것으로 보인다.
이중섭은 그의 삶과 예술 속에서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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