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팝아트 (Pop Art)

예술

by rooun 2022. 9. 28. 16:37

본문

728x90

소비의 쾌락

 

다다에 이어 뒤샹의 레디메이드 [샘, Fountain]을 통해 철물점의 변기를 미술의 맥락으로 옮겨왔고, 존 케이지가 생활의 소음을 음악으로 들려주었다면, 쓰레기를 미술로 만들었던 다음 세대의 작가들은 처음부터 미술이라는 사회적인 관습과 제도권에 대한 저항으로 출발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일상에서 느껴지는 현대적인 삶의 단편이었다.

 

팝아트는 1950년대 초 영국 작가 리차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에 의해 시작되어 대중사회에서 매스미디어 이미지 등 대중문화의 다양한 코드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예술이다. 산업문명의 급속한 발달에 기인하여 사회 전반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고 대량생산과 대중매체가 낳은 생활양식이며 산업예술이다.

 

리차드 해밀턴-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s so different, so appealing-1956
Richard Hamilton, [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s so different, so appealing],.1956

 

팝아트는 글자 그대로 대중문화(popular culture)와 미술(fine art)이 결합하여 탄생한 새로운 미술의 흐름으로, 1960년대 미국 문화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앗상블라주와 정크아트가 소비 중심사회의 이면을 쓰레기로 표현했다면, 그 뒤를 이어 은 팝아트는 정크와는 다르게 깨끗하고 매혹적인 새 물건의 피상에 집착했다.

 

미국 1960년대는 텔레비전이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대중문화의 확산,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의 본격적인 소비문화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들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끊임없는 경쟁을 시작하였다. 경쟁 산업화 속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상품들은 더 매력적인 포장과 로고, 가시성이 큰 거대한 광고판을 뒤덮었다. 물건을 구입하고 빨리 소모하는 방식은 문화의 영역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TV와 할리우드 같은 대중문화는 오락을 지속적으로 제공하였고, 소비자들은 순간의 만족 이후에는 또다시 새로운 자극을 원했다. 1960년 미국에서는 포장된 상품을 구입하고, 유명인의 스타일에 관심을 쏟는 것이 사람들에게 소일거리가 되었다.

이처럼 소비, 생산, 폐기로 이어지는 짧은 순환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문화는 현재 우리의 만연해진 삶의 연속이다. 60년대 전달 매체는 그다지 다양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매체는 인터넷과 이동통신의 발달로 소비문화의 거대 홍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맘껏 체험하는 우리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무엇인가를 소비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상품들을 끊임없이 광고하며 소비를 종용하는 사회이다.  우리는 이런 소비자의 삶을 지금까지 아주 충실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소비의 홍수가 시작한 1960년대 미국의 팝아트는 이처럼 소비자의 삶 속에 파고든 일상의 모든 것들을 소재로 차용했다. 상품과 광고, 텔레비전과 영화, 만화책과 연예인 등, 대중문화의 영역에 속해있던 모든 것들은 미술로 변모하여 화이트 큐브 안의 엄숙한 미술관 안에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팝아트는 소위 고급문화와 평범한 일상 사이의 경계선을 허물고자 했던 지난 세기의 전위적인 미술가의 계보를 잇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반미술이 물질만능주의와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난하고 공격하는데 몰두했다면 팝아트는 이에 대해 반하지 않고 불평도 없으며 그대로 포용했다는 차이가 있다.

 

앤디 워홀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팝 아티스트이다. 대표적인 세계 브랜드 브릴로의 상자 박스와 저렴한 인스턴트 수프인 캠벨 캉통 등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일용품들을 미술관에 그대로 옮긴 작품들을 발표했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미덕으로 삶는 현대 소비문화의 아이콘을 작품의 주제로 선택한 것이다. 워홀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소재뿐만이 아니라 그가 작업하는 스튜디오를 팩토리(공장)이라 불렀고, 작가 대신 작업을 할 수 있는 조수들을 고용했으며, 콜라병의 모양이나 수프 깡통의 로고를 기계적으로 복사하여, 실크 스크린으로 찍어냈다. 미술가가 직접 창조한 유일무이가 아닌 똑같은 이미지들을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워홀의 공장에서 전통적인 미술의 가치는 무너졌다.

 

앤디워홀-브릴로 박스-1964
Andy Wahol, Brillo Box, 1964
앤디워홀-캠벨 수프-1960
Andy Wahol, Campbell's Soup Cans, 1960

 

팝아트가 처음부터 대중들의 호응을 받고 오늘날처럼 대우를 받고 거래된 것은 아니다. 이전까지 잭슨 폴락과 윌리암 드 쿠닝과 같은 50-6-년대 뉴욕의 미술계를 주도했던 추상표현주의에 익숙했던 이들에게 장난스럽기만 한 팝아트는 충격스러웠다. 워홀과 리히텐슈타인 등의 작품에서는 더 이상 이전 시대의 아티스트처럼 고립된 스튜디오에서 혼자 고뇌하며 내재된 사고의 작업을 하던 미술가들을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전에 지식과 고상한 취미, 높은 학식을 갖춘 교양인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무엇을 만든 것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미술품의 등장은 새로운 계층의 미술 애호가들을 만들어냈다. 당대 많은 비평가들은 팝아트를 비난했지만, 대형 미술관과 갤러리, 컬렉터와 딜러들의 옹호 아래 팝아트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