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마네(Eduard Marnet, 1832-1883)는 19세기 프랑스 화가의 한 사람이다. 인상주의자로 간주되었지만 그의 예술은 기본적으로 사실주의이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 자신이 1870년대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와 연관을 맺고있다. 또한 마네는 인상주의 형성기에 그룹의 리더 역할을 담당했지만 인상주의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거나 인상주의자들의 생각이나 기법을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마네는 강한 명암 대조의 극적인 표현에서 출발하여 밝고 단일한 색의 사용과 자유로운 구성을 통해 자신의 고유하고 새로운 예술세계를 구축하였다.
마네는 회화에서 모던 시기를 연 화가이다. 양식과 주제 모두 새로운 시도였다. 밝고 평면적인 화면은 전통적인 아카데미 기법의 화풍을 벗어난 새로운 형식의 시도였고, 그의 제재 또한 모던하였다. 1920년대 비평가들은 마네의 회화를 순순예술로 규정하면서 무엇보다 형식에서의 새로움으로 그의 예술을 평가했다. 마네의 회화가 주제와 형식 모두 새로운 특성을 지닌 모던회화라는 시작점이다.
1832년 부유한 부르주아 가정에서 출생한 마네는 어린 시절부터 드로잉과 캐리커쳐에 뛰어났다. 그러나 회화적 교육은 해군학교 진학에 실패한 후 1850년에 시작된다. 마네의 회화적 능력을 인정한 외삼촌과 친구 푸르스트의 격려에 힘입어 당대 유명한 미술교욱 기관인 토마스 쿠틔르의 아틀리에 등록한다. 이 때 그는 당대의 많은 화가들의 교육방식으로 통용되던 대가들의 작품연구에 몰두한다. 그는 루브르에서 주로 베네치아 피렌체 르네상스의 대가들 그리고 네덜란드 장르 화가들의 작품을 복사하며 연구한다. 그 후 벨기에, 홀랜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의 여러 유럽을 여행하며 많은 미술관을 방문한다.
1859년 이후 마네는 예술의 성숙과 결혼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작품은 여전히 어두운 톤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예술이 과거의 대가들, 특히 벨라스케즈, 루벤스,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에 영향을 받은 것임을 말해준다.
861년 그의 작품은 처음으로 살롱에 입선하여 좋은 평가를 받는다. 동시에 개인 화랑에서의 전시 기회도 가진다. 1862년의 [튈르리 공원에서의 연주]를 시작으로 마네는 점차 동시대 부르주아의 삶을 소재로 선택한다. 1863년 살롱에 출품한 세편의 작품들은 모두 거부되고 혹독한 비평의 대상이 되지 '낙선자들을 위한 전시를 갖는 기회를 가진다.
[풀밭에서의 식사, 1863]가 티치아노와 라파엘로의 영향을 반영한다면 [올랭피아, 1863]는 벨라스케즈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마네는 드가와 함께 대도시 부르주아 남성의 전형인 플라뇌르의 시선으로 현대인의 삶의 곳곳을 관찰하고 그려낸 화가의 한 사람이다. (플라뇌르: 거니는자(산책자)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19시기의 도시의 스펙터클을 관조하는 참여적 관찰자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새를 보들레르에 의해 처음 명명되었다)
문인 비평가 에밀 졸라(Emile Zila)가 마네의 1866년 살롱의 낙선작인 [피리부는 소년, 1866]과 [비극적인 배우, 1865]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비평을 게재했다. 다음해인 1867년 졸라는 마침애 마네에 대한 책을 발간하였는데, 이는 마네가 미술계와 대중의 주목을 받게 하는데 기여를 하였다. 1867년 국제 박람회 '현대미술전'에 초대받지 못한 마네는 50편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고야의 [1808 5월 3일, 1808]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 1867]을 비롯한 대형 작품의 제작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정치적인 시각을 담고 있고 마네의 공화주의적 공감을 읽을 수 있지만 마네는 크게 정치적인 성향의 인물이 아니었다.
1870년 프러시아(프로이센)와 프랑스의 전쟁은 마네의 예술세계를 변화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시가 전후하여 그의 예술은 나뉜다. 마네는 전쟁기간과 그 직후 자신의 가족을 피레네 지역의 휴양지에 머물게 하는데 그도 많은 시간을 시골에서 보내게 된다. 네덜란드로의 여행에서 프란스 할스를 재발견한 것은 이 때의 그의 회화에 영향을 준 측면이다. 1867년 사망한 보들레를 이어 이 시기 말라르메가 마네의 예술을 옹호하는데 힘섰다. 이 외에도 당대의 문인, 화가, 음악가들이 마네의 화실을 즐겨 찾았다.
1870년대 초 마네는 더 강한 색조의 채색을 선택하면서 어두운 배경을 배제하기 시작한 [부채를 든 여인, 1862]처럼 그림에는 대단히 자유롭고 빠른 스케치풍의 필선이 특징이다. 이는 할스 이외에도 젊은 인상주의자들과의 교류 흔적을 말해준다. 이 시기의 마네의 그림에서는 밝은 자연 풍경에 대한 관심을 읽을 수 있다.
1879년 병든 마네는 그의 마지막 화실을 파리의 암스테르담 거리에 정하고, 매년 근처 시골의 휴양을 즐기는 생활로 접어든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주로 작은 정물화를 그렸다. 이전까지 출품 살롱과는 만족스러운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1881년 살롱전에서 차상을 받는 행운과 또한 국민훈장의 대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도 가졌다.
마네는 최후의 걸작[폴리제르의 바, 1882]에서 우리는 한 술집 종업원의 모습이 바의 정경과 함께 거울에 투영된 장면을 만난다. 주 모티브가 거울에 투영되게 그려진 점, 이 그림은 사실주의를 넘어선 상징주의로 해석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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