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는 고등학생 때 멕시코시티 학교에서 의예과 과정을 준비하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하굣길에 그녀가 타고 가던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한 후 그녀의 인생은 달라졌다. 의사의 길이 아닌 인상적인 자전적 캔버스를 그리는 화가가 되어 그녀의 신체적 고통과 정서적 고뇌를 그림을 통해 표현하였다.
짧지만 치열하게 살았던 그녀는 150-200점의 그림을 그렸고, 그중 대부분은 자화상, 가족과 친구의 묘사, 정물화였다. 비유적이고 매우 개인적인 그녀의 그림은 멕시코의 민속주의와 상징주의를 융합하여 초현실주의적이면서 칼로의 생생한 경험을 보여주었다. 또한 멕시코인의 보헤미안적인 정체성을 가진 그녀는 멕시코 혁명과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지지, 자유주의 정치의 뚜렷한 소신을 가졌다.
초기 시작
1907년생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독일계 유대인 사진작가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원주민과 스페인 유산의 카톨릭 신자였다. 칼로는 네 자매 중 셋째로, 어릴 때부터 사진 스튜디오에서 아버지를 돕도록 훈련을 받았다.
칼로는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와 발이 왼쪽 다리보다 영구적으로 작아졌다. 그녀의 바닥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는 그녀의 멕시코 정체성을 강조하는 단순한 패션 표현이 아니라 이러한 기형으로부터 관심을 돌리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었다.
칼로는 사고로 인해 평생동안 코르셋을 착용해야 했고, 30번이 넘는 수술, 여러 차례 유산과 낙태를 경험했다. 그녀의 주 생활 반경은 침대였다. 오랜 회복 기간 동안 침대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침대 밑면에 설치해 놓은 거울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칼로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자화상을 사용하면서 이는 계속해서 다시 찾게 되는 주제이기도 하였다.
칼로와 리베라
리베라는 칼로보다 20살이 더 많은 당시 유명한 예술가였다. 그들은 1929년 결혼하였지만 리베라의 심한 여성 편력으로 결합과 이혼을 번복하며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결혼 초기를 미국에서 보냈으며, 칼로는 그곳에서 창조적 각성을 경험하고 살면서 중요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칼로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면서 제작한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의 결혼 초상화에 자신을 묘사하였는데(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1931), 리베라보다 지나치게 작은 칼로와 그녀의 작은 발은 거의 바닥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숄은 불타오르는 붉은색으로 강조되어 강인함을 표현하고 있다. 디에고 옆의 칼로의 모습은 작은 인형같이 왜소한 크기지만 그녀의 내면만큼은 강하고 아주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미국의 칼로
미국에 있는 동안 당시 유명한 리베라는 벽화 의뢰 및 기타 프로젝트 의뢰가 많아 작업이 많었고, 칼로는 신인 예술가로 떠오르며 확실한 인상을 주는 시기였다. 그러나 실제로 1933년 디트로이트 신문에 실린 그녀에 대한 기사는 "벽화가의 아내가 예술 작품에 즐겁게 손을 댄다"라는 제목으로 실렸는데, 이는 칼로를 디에고란 파트너의 그늘 정도에 둔 인물 정도로 여기던 경력 초창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로는 자신만의 개인적인 경험을 전달하는 꿈같은 스타일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위대한 예술가 칼로
칼로의 경력은 1938년경 그녀의 작품이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바뀌었다. 그해 여름 할리우드 배우이자 수집가인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G. Robinson)이 리베라의 스튜디오를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판매를 하였다. 이는 칼로에게 디에고의 도움 없이도 경제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점이었다.
몇 달 후 칼로는 뉴욕의 줄리안 레비(Julien Levy)갤러리에서 25점의 그림을 전시하는 생애 단 2번의 개인전 중 하나인 첫 개인전을 가졌다. 이 개인전을 통해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s) 외에 유명한 큐레이더, 미술사학자 등 미술계 영향력 있는 관중이 모이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멕시코에서 칼로를 만나 그녀를 초현실주의자라고 불렀던 앙드레 브레통(Andre Breton)은 칼로의 작품을 "폭탄 주위의 리본"으로 묘사하는 그녀에 대한 에세이를 썼다.
칼로는 줄리앙 레비 갤러리에서 그녀가 평생 동안 그렸던 30개 정도의 정물화 중 하나인 피타하야스(Pitahayas)를 전시했다. 알루미늄에 유화로 그린 이 작품은 화산암과 선인장에 기대어 있는 썩어가는 파타하야 과일 5개와 선인장과 작게 스케치된 해골 그림이 낫을 들고 그 방향으로 가리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1939년 칼로는 피타하야스와 다른 17점의 그림을 뉴욕에서 파리의 피에르 콜 갤러리 (Pierre Cole Gallery)로 옮겨 마르셀 뒤샹의 도움을 받아 브레통이 준비한 멕시코 예술 그룹 전시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카사 아줄 (Casa Azul)
칼로가 몇 달간의 해외여행을 마치고 프랑스에서 멕시코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리베라가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발견하고 1939년 이혼하기로 합의를 하였다. 그 후 그녀의 가장 큰 그림 중 하나인 두 명의 프리다의 자화상을 완성하였다. 두 명의 프리다에서 두 이미지의 칼로는 손을 잡고 노출된 심장이 동맥으로 연결되어 유럽의 프리다와 멕시코의 프리다 모습을 표현한 이중 자화상이다. 칼로는 이혼 후 건강이 악화되자 리베라는 칼로의 주치의에게 조언을 구했고, 결국 그는 칼로에게 동료로서 화해하자고 제안하여 194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재혼했다.
칼로는 그 이후에는 대부분 멕시코시티에 머물렀고, 그녀의 작품은 1942년 현대 미술관에서 열린 "20세기 초상화"와 1943년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예술 갤러리에서 열린 "31명의 여성 전시"를 포함하여 1940년대 멕시코와 미국에서 열린 그룹 전시회에서 선보이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칼로 생애의 두 번째 개인전은 1953년 여름 멕시코시티의 현대 미술관에서 진행했다. 그 무렵 이미 건강이 좋지 않은 칼로는 들것에 실려 개막식 밤 축제에 참석한 후 갤러리로 가져온 침대에 누워있었다. 안타깝게도 같은 해 칼로의 오른쪽 다리는 무릎 아래에서 절단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칼로는 1954년 7월 47세의 나이로 카사 아줄에서 폐색전증 또는 자살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관은 멕시코시티의 벨라스 아르테스 궁전 원형 홀에 설치되었으며, 그곳에서 라자로 카르데아스 전 대통령과 같은 저명한 조문객들이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녀의 마지막 그림은 Viva la Vida라는 글자를 새긴 수박 정물화로, 현재 그녀가 죽은 지 4년 만에 박물관이 된 카사 아줄에 영구 전시되어 있다. 칼로가 태어나고 자라고 죽음을 맞이한 집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순례지가 된 카사 아줄에는 개인 민속 예술 컬렉션, 사진, 유명한 그녀의 4 주식 침대, 이젤 옆에 있는 안료와 붓이 포함되어 있다. 그녀의 재를 담은 항아리까지 있다고 전해진다.
"나는 아프지 않아요. 나는 망가졌다." 칼로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래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살아있어서 행복해요."
보헤미안 멕시코인과 자유주의 정치적 소신이 뚜렷한 인물인 그녀가 대중과 공유한 자신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녀를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만드는 것의 일부이기도 하다.(그녀에 대한 새로운 다큐멘터리가 2024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초연될 예정이라고 한다) 최근 프리다 칼로의 캔버스가 현대로 부활한 느낌으로 재현된 디올의 2024 크루즈 컬렉션이 눈길을 끈다. 이 화보들은 프리다 칼로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여성성을 동기화시킨 모습으로 디올이 추구하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프리다의 자화상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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