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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예술

by rooun 2023. 5. 30.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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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o da Vinci, Mona Lisa, c. 1503-19, Louvre, Paris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왜유명할까?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한 피렌체 여인의 초상화인 모나리자는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빈치의 인기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대의적 관심을 끌기 위해 다빈치의 초상화를 훼손하려는 시도도 있었고 마르셀 뒤샹부터 버질 아블로까지 다양한 예술가들은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모나리자의 특별한 점은 무엇이며, 왜 우리는 이토록 모나리자에 관심을 가질까?

역사학 교수이자 최근 레오나르도 전기 작가인 월터 아이작슨은
'모나리자는 거의 제일 마지막에 그려진 작품으로 보고. 예술과 자연의 교차점에 서는 능력을 키우는데 한평생을 바친 인생의 정점으로 탐구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듯하며, 포플러 패널 위에 수년에 걸쳐 여러 겹의 글레이즈를 얇게 덧입혀 완성된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가진 천재성의 여러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크 상인의 젊은 아내의 초상화로 시작한 그림은, 옅은 미소의 미스터리를 통해 전달되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묘사하고 우리의 본성과 우주의 본성의 연관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모나리자는 관람자로 하여금 다빈치의 경이로운 관찰력을 기반으로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해석으로는 그녀의 옅은 미소의 미스터리를 통해 그녀를 악명 높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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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여인의 정체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에 살던 ;1503년경 이 상징적인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10년이 넘도록 완성하지 못했다.
모나리자에 그려진 여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과 추측이 있다. 그러나 다빈치 자신이 그림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여인의 정체는 여전히 미스터리한 상태이다.

16세기 미술사학자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 의 <가장 뛰어난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삶>에서 모나리자를 묘사한 초기 자료에 따르면 그녀는 피렌체 비단 상인 프란체스코 델 지오콘도의 아내인 리사 제라르디니(Lisa Gherardini)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가설에 불과하며 확실한 증거는 없다.


Leonardo da Vinci, Ginevra de' benci, c.1474-78, National Gallery og Art, Washinton, D.C.




색다른 초상화 기법


레오나르도는 실험과 혁신으로 유명했으며 모나리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Ghirlandaio, Domenico_Retrato de Giovanna Tomabuoni, 1489-1490

당시 많은 르네상스 이탈리아 초상화(위 도메니코 질란데이오의 '조반나 델리 알비지 토르나부오니의 초상' 등)의 주요 특징은 인물의 현실적인 비례와 형태를 강조하고, 인물의 얼굴과 체형은 사실적으로 재현되어 있으며, 인물의 실제 모습을 전달하기 위해 형식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다빈치의 초상화는 기존의 형식적인 표현과는 다르게 현실감과 더불어 미적 감각을 조화롭게 표현하였고, 배경이 군더더기가 없이 단순하게 처리되는 일반적인 초상화와는 다르게 배경에 자연환경을 그려내어 공간감을 표현했다. 이는 그림 전체에 깊이와 명암감을 더하는 효과를 준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독특한 분위기의 초상화로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띠며 레오나르도 특유의 스모키 소프트 포커스인 스푸마토로 렌더링 되어 딱딱한 선과 테두리를 제거하여 피사체의 피부가 빛나게 표현되었다.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는 이 백열등 표면 아래에서 얼굴 근육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여주었다. ;모나리자를 그리는 동안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의 시체 안치소에서 시체를 해부하며 해부학을 공부했고, 이를 통해 미소를 그린 최초의 해부학적 그림을 제작할 수 있었다.

바사리는 모나리자에 대해

"레오나르도의 이 작품에는 인간보다 더 신성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쁜 미소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라고 썼다.


모나리자의 강도 사건


바사리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미술 평론가들은 186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 그림을 르네상스 걸작으로 칭송하기 시작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1804년에 이 그림을 인수했지만, 1911년 헤드라인을 통해 대중의 의식 속에 확고히 자리 잡기 전까지는 많은 관람객이 찾지는 않았다.

1913, the Mona Lisa on display in the Uffizi in Florence. Museum director Giovanni Poggi inspects the painting, soon to br returned to the Louvre, Unknown photographer.


1911년 8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림이 걸려 있던 곳에는 그림들과 안내문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사건이 알려지자 프랑스와 국제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 사건은 대규모 수사와 광범위한 보도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경찰 수사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다. 사건은 국제적인 관심과 논란을 일으키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와 애도가 일었었다.

언론의 열광에 힘입어 박물관 관람객들은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던 빈 공간을 보러 가고, ;엽서가 인쇄되고, 모나리자 인형이 만들어져 판매되었으며, 2년 후 모나리자가 되찾았을 때는 더 많은 인파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고, 첫 이틀 동안에만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나리자를 보러 왔다.


모나리자 오마주와 패러디의 원천


1914년에 이르러 모나리자는 높은 인지도를 얻게 되었고, 모나리자는 예술 작품의 무르익은 소재가 되었습니다.
이는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어서, 많은 예술가들이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차용한 작품

1. 카지미르 말레비치(Kazamir Malevich)의 모나리자와의 구도(Composition With the Mona Lisa,1914):
러시아의 초현실주의 화가 말레비치는 ;모나리자를 중심으로 색채를 재현한 혼합 매체 콜라주 작품을 제작했다.

2. 마르셀 뒤샹의 (L.H.O.O.Q., 1919):
1919년에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수염을 추가하고 제목을 L.H.O.O.Q.로 바꾸었다.
흑백 모나리자 엽서를 레디메이드로 사용하여 콧수염, 수염, 글자(프랑스어로 소리 내어 읽으면 "엘르 아 쇼드 오 쿨" 또는 "그녀는 엉덩이가 섹시하다"로 들린다)를 낙서한L.H.O.O.Q. 를 만들었다. 이는 다빈치의 작품에 대한 상징적인 해체와 재해석을 시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3. 존 레넌(John Lennon)의 Moona Lisa:

비틀즈의 멤버이자 음악가인 존은 자신의 앨범 커버에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였는데, 그의 앨범 'Walls and Bridge'의 커버에는 모나리자의 얼굴에 레논 자신의 얼굴이 합성된 이미지다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예술가들도 그 뒤를 따랐는데, ;페르난드 레제(Fernand Léger)는 ('La Joconde aux Clés, 1930')를를 그렸고, 필립 할스만(Philippe Halsman)은 달리의 모나리자(Dali as a Mona Lisa, 1954)를 제작했으며,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는 1959년에 통통한 모나리자를 만들어 1978년에 다시 그렸다. 1963년에는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이 초기 실크스크린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

Fernando Botero, Mona Lisa, 1978


워홀의 전성기 이후 1960년대의 경제 호황으로 광고가 활기를 띠면서 모나리자는 마케팅 캠페인에 정기적인 카메오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는 연간 약 23개의 새로운 광고에 모나리자가 등장했으며, 이후 10년 동안에는 그 수가 계속해서 증가했다. 모나리자의 얼굴은 제품에 예술사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모나리자 자신의 인기에도 힘을 실어주었다. 이러한 현상은 다빈치의 작품이 예술의 아이콘으로서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이다. ;


파리의 랜드마크


1960년대 광고 캠페인의 붐과 함께 단체 관광이 시작되었고, 파리는 최고의 국제 여행지로 부상하였다.
모나리자는 16세기 초 레오나르도가 프란시스 1세의 궁정에 모나리자를 가져온 이후 프랑스 땅을 떠난 적이 거의 없어 다른 파리 관광 명소만큼이나 영구적인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First Lady Jacqueline Kennedy attends the opening of the Mona Lisa exhibit at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1963, Photo: WHite House Phtographers, John F. Kennedy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Boston


모나리자가 루브르 박물관을 떠난 몇 번의 순간은 오히려 열광적인 모나리자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그 중 가장 화려했던 순간은 1963년 재클린 케네디가 뉴욕의 국립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도왔던 때였다.

모나리자는 ;케네디 부부의 환영을 받으며 공식 만찬(디저트는 데친 배에 초콜릿 소스를 발라 페이스트리로 구운 푸아레 모나리자였다)에 ;대접받은 유명인과 같았다. 미국인들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고, 미국에 전시되는 ;6주 동안 엄청난 인파가 박물관을 방문했다.
10년 후 모나리자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투어가 반복되었고, 이후 전 세계 언론의 관심으로 모나리자는 아이콘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모나리자는 계속적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이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방문하는 방문객들은 박물관에서 나폴레옹 3세가 입법 회의를 위해 사용했던 가장 큰 방 살레 데 에타트에 전시되어 있으며 방탄 케이스와 전용 벽으로 보호되고 있다.

2018년 유출된 프랑스 문화부 보고서에 따르면 루브르 박물관의 영구 소장품에 포함된 많은 걸작들 중에서 방문객 10명 중 9명은 레오나르도의 여인을 보러 온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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