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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규격화 - 바우하우스(Bauhaus)

예술

by rooun 2021. 4. 25.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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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누구를 위한 예술인가?
과거의 예술은 소유가 가능한 자들의 사적 자산이며, 예술은 그들의 든든한 후원으로 예술가만이 혼자 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생활하는 일상에 누구나 미학을 넣을 수 있도록 단초를 마련하고 창조적인 경험을 하게 만든 계기는 바우하우스임에 틀림없다. 즉 누구나 창조가 가능하도록 모듈울 제시하고 단위의 규격화를 만든 것이다. 예술이 우리의 삶 속에 디자인과 연결하여 일상에 고착화된 것이다.

바우하우스, 데사우(Bauhaus, Dessau)

 

바우하우스, 데사우(Bauhaus, Dessau)




바우하우스(Staatliches Bauhaus)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 바이마르에 설립되고 운영된 학교로, 1925년 데사우로 옮겼으며 미술, 공예, 건축, 사진, 디자인 등과 관련된 종합적인 예술 내용을 교육한 기관이다. 시작은 공예 분야의 장인(마이스터)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지만 그 뒤 현대 디자인의 초석을 이루고 완성시키며, 모더니즘의 근간이 되어 지금까지 현대식 건축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설립하여 초대 학장을 지녔으며 1933년 나치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기까지 14년간 운영되었다. 발터 그로피우스 이후 한네스 마이어(Hannes Mayer)와 미스 반 데어 로어(Ludwig Mies van der Rohe)가 학장에 취임되었고, 현대 예술가로 유명한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애니 알버스(Anni Albers),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 파울 클레(Paul Klee),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마르셀 브로이어( Marcel Breuer), 등 바우하우스의 교육을 담당했다.

바우하우스 아트리에, 바우하우스 교수진, 1926, 발터 그로피우스(왼 7번쨰)




바우하우스 로고




바우하우스 설립의 시대적 배경
1919년 바우하우스가 설립되기 이전 시대적 배경은 산업혁명의 시기로 유럽 사회는 급속한 기술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산업기술의 발전은 사회 여러 부분에서 새로운 문제점들을 야기하였다. 그것은 기계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인간 소외에 대한 두려움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적극적 도입이라는 두 가지의 입장으로 양분된다. 전자는 영국의 모리스(William Morris)와 러스킨(John Ruskin)에 의한 미술 공예 운동으로 표현되었고, 후자는 독일 공작 연맹으로 대변된다.
독일 공작 연맹(Deucher Wekbund)은 1907년 독일 뮌헨에서 결성된 단체로 수공예 대신 대량생산으로 공예산업의 활성화를 추진하였다. 산업체의 디자이너 고용을 장려하고 제품의 개선을 위해 미술, 공예와 산업의 조화를 통해 독일 제품의 질적인 향상을 이루려고 하였다. 독일은 영국에 비해 공업화가 늦었지만 기계 제품에 대한 저항이 적어 오히려 그 장점을 수용하기 수월했다. 또한 산업계에서 적극적인 예술의 수용으로 조형미를 중시하는 제품들이 주목받게 되면서 산업적, 예술적 측면에서 조직화, 근대화가 용이했다.

바우하우스의 설립자 -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1900년대 유럽은 디자인에 대한 개념도 확립되지 않았고, 이에 대한 교육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이었기에 그로피우스는 조형 예술가, 조형 교육자로서 바우하우스를 통해 근대 디자이너 교육이라는 분야에 큰 업적을 남기었다. 또한 당시 디자인 미학에 대해 미비한 교육제도, 기술에 대한 배타적인 자세와 정형화된 교육방식에 의존하는 구 아카데미즘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시대적, 사회적인 상황을 예리하고 정확하게 파악했으며 다가올 디자인의 미래에 대한 실현 가능성의 기반을 만들어 놓았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의 설립 목적을 “디자인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근본적 통일이라는 이념을 세워 모든 기술적, 미적, 상업적 요구에 적합한 형식을 창조하기 위한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밝혔다. 바우하우스는 그로피우스가 생각했던 조형교육의 이론을 실천적인 영역으로 확대하여 기능, 공간, 창조, 조화, 표준화와 같은 질서 속에 조형에 대한 새로운 기능적 사고방식과 사회를 위한다는 신념을 추구하였다. 그는 바우하우스의 교육을 통해 자신의 조형 이념인 디자인 표준화와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의 의미를 학생들에게 전달시켰다. 당시 독일 공작 연맹의 회원이었던 그로피우스는 미술 공예 운동의 수공예 부흥 정신과 공작 연맹의 표준화 정신을 동시에 계승하고 자신이 가진 건축과 공예에 관한 신념을 기반으로 바우하우스를 설립하였다. 그는 표준화를 통한 기계의 대량생산을 옹호하면서도 예술가 개개인의 창의적인 발상과 조형 의지를 존중했기 때문에 표준화를 통해서 개성이 침해당한다 고 보지는 않았다.


"건축과 조각, 회화의 모든 것이 하나의 형태로 될 미래의 새로운 건물을 함께 만들어 갑시다"
"장인과 예술가 사이의 오만한 장벽을 높이는 계급 구분 없이 새로운 장인 길드를 만드는 것이다"

-발터 그로피우스





발터 그로피우스






바우하우스의 특징
바우하우스의 원칙에 예술가와 장인 사이에는 경계가 없고, 예술가를 고귀한 장인으로 일컫는다.
그러므로 순수미술과 동등한 공예의 지위 향상을 추구하고 장인의 기술에 대한 숙련은 모든 예술가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바우하우스가 추구하는 바는 총체적인 예술이다.
이는 여러 예술 형식의 합성을 의미하며 형태의 창조가 조형 활동에 가장 기본이 된다는 이념 아래 예술과 기능을 접목하고 형태와 재료의 사용에 대해 연구하게 된다. 따라서 이를 교육하기 위한 방법들을 연구하고 전달하기 위한 목표들을 다음처럼 제시한다.

첫째, 각기 흩어져 있던 모든 미술 분야를 통합하고, 공예가와 예술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모든 기술을 결합시켜 협동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목표는 공예의 지위를 순수미술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세 번째 목표는 공예 및 산업체 지도자들과의 지속적인 접촉을 확립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예술과 기능의 통합으로 최적화된 시스템을 안착시키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우하우스의 이상적인 디자인론은 단순화된 기하학적 형태 구성을 기본으로 조형물의 기능성과 형태에 디자인적인 공통 요소들을 찾아내 표준형을 만드는 것이며, 기계를 통해 대량 생산해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표준형의 의미는 만들기 쉬운 공장 생산품의 의미가 아니라 최고 수준의 원형(prototype)을 의미하며, 우수한 품질의 본질적인 것의 추구이다. 이와 같은 디자인 이론은 공예와 공학기술의 통합으로 구현되는 건축 최종 매체로 생각하여 기계기술을 건축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고, 합리적인 비용으로 주택을 대량 생산하는 조립식 가옥의 부품 제조로 이어졌다.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된 공동주택의 원형이 일자형 아파트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조립 방식의 건축 형태가 계승되고 발전되어 지금의 아파트 건축방식으로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최종적으로 바우하우스가 지향하는 건축이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통합된 예술로서의 건축 즉, 건물과 그 속의 포함된 가구, 조명, 장식 등 인간 환경 전체의 조형을 의미하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의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건물을 포함하는 모든 부속물까지 디자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런 사고는 현대적 개념의 토털 디자인 또는 라이프 스타일 디자인에 근접해 있었으며 한 시대에 한정되는 예술 이념을 초월하여 현대 디자인의 초석이 되었다.

바우하우스는 항상 새로운 기술, 재료, 건축 방식, 태도에 관해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러한 방식은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의 모든 디자인 산업에 퍼져 있다. 특히 건축이야말로 완성된 조형 영역인 동시에 시대의 정신적, 물질적인 능력의 가장 큰 가시적인 표현방법이고 인간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바우하우스가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예술 통합 사상을 표명한 배경에는 이러한 인간 중심의 조형 사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의 교육
바우하우스가 추구하였던 디자인 교육에서 가장 우선하는 점은 기능주의다.
바우하우스는 변화된 교육방법을 통하여 창의적인 디자이너를 양성하고, 예술과 기술의 통합에서 기초적인 조형감각과 사고력의 훈련을 통한 공업기술의 정신은 물론, 미적이고 기술적인 탁월성을 겸비한 제품의 창조를 추구하였다. 또한 생활과 예술의 결합이라는 조형 이념을 교육적으로 실천하고, 인간 활동은 모든 창조력의 협동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라 믿었다.
바우하우스 교육 체계는 건축을 중심으로 목재(Wood), 금속(Metal), 섬유(Textiles), 색채(Color), 유리(Glass), 도자기(Clay) 분야 등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는 교육 방법으로 이는 유럽의 디자인과 예술교육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바우하우스 출신들이 20세기 주요 디자이너들의 명단에 상당수 포함되어 있고, 또한 바우하우스의 제품들 중 오늘날까지도 활발히 생산되고 활용되는 제품과 디자인들이 많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주목받게 되는 것이다.

마르셀 브로이어, 바실리 의자((Marcel Breuer, Wassily Chair)



과학기술의 발달로 변화된 디자인 환경을 접하게 되었던 1900년대 초와 디지털이라는 혁명적인 기술 변혁의 시대를 맞이한 현재의 상황은 아마도 급격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해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비슷한 시대적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1900년대 초는 수공예에서 기계공업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였으며 사람들에게 인간이 아닌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했던 시기였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기계의 출현은 디자인 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으로 인식되었기에 기계의 도움으로 대량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산업 디자인이 발전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바우하우스 디자인 교육이 목표했던 기능주의는 바우하우스 시대를 지나 현재 세계 산업 디자인과 건축분야의 조형 이념으로 자리 잡아 왔다. 이 기능주의는 재료, 구조, 형태와 기능을 구체화하는 이상적인 모더니즘 디자인 운동의 기본 철학으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고 말할 정도로 형태보다는 제품이 가지는 기능을 우선시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좋은 디자인은 일상생활과 제품의 유용성을 모두 포함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 시대의 문화를 대변하는 디자인이 현대 사회에서는 어떠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디자인의 위치는 생활의 일부분인 소비 중심의 대중적 디자인을 통하여 가장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은 사물을 간략하고 충실하게 본질적인 특성에 따라 디자인하는데 기초를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우하우스가 연구한 제품의 형태는 일시적 유행에 따른 결과물이 아닌 예술, 기술, 경제, 형태 부여 등 수없이 많은 사고와 작업의 과정에서 우러나온 뚜렷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바우하우스 시대의 산업 디자인은 제품의 기능과 형태에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현재의 기업 디자이너의 대부분은 제품의 본질을 디자인하는 산업디자인보다는 유행 소비재의 스타일리스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우하우스 시대는 디자인이 대중의 삶을 좀 더 윤택하고 편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현대는 현대인 다수의 감각을 자극하여 제품을 팔기 위한 판매 수단으로써 상업적인 목적을 지닌 디자인에 더욱 편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고객 지향의 상품을 만들지만 고객 니드에 맞게 제품의 디자인은 한정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디자이너가 다수성, 대중성이라는 명분에 예속되는 한 진정한 창의성은 상실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스 반 데어 로어, 바르셀로나 의자(Mies van der Rohe)




바우하우스는 산업 혁명에 뿌리를 둔 거대한 역사의 일부분이며 근본적으로 바우하우스에서 우리는 예술과 기술을 통합하고자 했던 조형 이념을 찾을 수 있다. 날로 새로워지는 기술과 학문에 있어 디자인 교육처럼 적극적으로 새로움을 받아들이고 재생산하는 학문은 많지 않다.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던 일련의 디자인 작업들이 컴퓨터의 탄생으로 인하여 더 많은 디자인적 가능성을 만들어 냈으며 디자인의 분야를 디지털 매체로 확장시켰다. 또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출현은 더 많은 디자인적인 요구와 발전을 가속화시켰다. 현대의 디자인은 디지털이라는 개념을 배제하고는 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색상은 디지털 위주 색상으로 바뀌었고 채색 위주의 방식을 이미지 제작 도구가 대체했으며 인쇄술은 전자출판으로 바뀌었다. 인쇄와 화상들은 더 이상 금속판과 잉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대신 전자 화상들과 레이저 기술이라는 고도의 기술을 응용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렇듯 디자인의 환경이 새로운 디지털 디자인 환경으로 재편되어 버렸지만 디자인을 실행하고 창조하는 인간의 역할은 AI가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100여 년 전 당시 변화의 중심이 기계였다면 현재 변화의 중심은 디지털(Digital)이다. 디지털 혁명은 21세기 인류의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디지털 혁명은 과거 산업혁명으로 발생된 새로운 산업과 문화의 발전 이상으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고 있고 더욱 발전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는 현재 디지털 장치들 속에서 프로그래밍된 사이버네틱 구조를 취하고 있어, 그 안에서 보이는 많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대한 사적, 문화적으로 급격히 동화 현상을 일으킨다. 또한 새로운 아이디어, 제품, 서비스 등에 대해 놀랄 만큼 빠르게 수용하고 애착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변화에 대해 완전무결하게 준비를 했거나 결과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할 수는 없지만 변화의 구조와 역사적인 흐름을 인식함으로써 가능한 미래의 모습에 대해 기대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참고
바우하우스/김종균, 신희경 외 4인/안그라픽스
https://art.art/blog/10-bauhaus-principles-that-still-apply-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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