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체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고 입체파 그림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큐비즘이 현대미술에 어떤 관련을 가지는지, 또한 서양 미술의 전통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정도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과소평가 되어 왔다.
20세기 초 큐비즘의 등장은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부흥 이후 지배적이었던 전통적인 예술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이러한 관습 아래 입체파는 비난을 받았지만 향후 아방가르드 운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큐비즘의 경향은 비교적 수명은 짧았으나 10년 정도 지나 새로운 경향으로 흡수되거나 대체되면서 사라졌다. 조각도 한몫을 했지만 큐비즘은 주로 회화, 고전 미학의 재발견에 기반한 패러다임에 관심이 있었다.
전통적인 회화 양식처럼 큐비즘은 자연에 충실했으며, 기하학적 원근법(거리감을 연상시키는)과 키아로스코(빛의 그라데이션을 이용한 모델링)를 결합하여 형태와 공간에 새로운 입체감을 부여했다. 이와 함께 유약 및 바니시를 이용하는 유화 물감이 널리 사용되면서 붓의 흔적을 최소화하고 빛이 색의 층을 투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촘촘하게 컬러가 입혀진 표면이 현실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추구하였다.
전통적인 회화란 보여지는 장면을 영원히 고정할 수 있고 사진이 발명되기 전까지 존재를 시각적으로 기록하는 주요 도구로 사용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는 보이는 것에 대해 과학적으로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예술적 틀의 핵심이었으며, 이후 매너리즘(Mannerism), 바로크(Baroque), 로코코(Rococo) 등의 다양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19세기 획기적인 화풍의 인상주의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모네의 건초 더미는 여전히 건초 더미와 비슷했다. 하지만 입체파는 아주 달랐다. 인물과 사물 등 평면적인 구성으로 형태를 축소하여 깊이에 대한 인식을 제거했다. 물체는 여러 각도에서 동시에 묘사되었으며, 종종 피사체 위와 주변의 시선 이동을 암시하기 위해 패턴이 바뀌는 방식으로 묘사되기도 하었다. 입체파는 특정 시점의 사물을 정적인 시각으로 표현하는 대신 시각의 운동감을 여러 각도로 표현하였다.
입체파가 20세기 미술의 시작을 알렸다. 19세기, 그 이전까지 회화는 올드 마스터 모델을 기반으로 회화와 조각에 대한 규칙을 성문화한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엄격한 규율을 준수하려고 애썼지만 점차 전통적인 아카데미 규범이 폐기되면서 아카데미의 제도적 힘은 점차 약화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카데미가 다른 모든 장르보다 우선시했던 역사 회화 대신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와 같은 카테고리로 바뀌였고, 아카데미의 핵심 주재였던 교회, 국가, 고전 신화의 숭고함이 현대의 삶을 그리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큐비즘으로의 전환은 1880년 무렵, 지금은 상징적인 이름이 된 쇠라(Seurat), 고갱(Gaugin), 반 고흐(Van Gogh), 세잔(Cézanne)등이 포함된 후기 인상파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들의 작품은 기질과 주제는 매우 다양했지만, 모두 물감과 색채를 다루는 방식에서 사실주의의 경계를 넓혔다.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는 안료를 소량만 사용하여 색을 광학적으로 구성하여 세분화함으로써 가장 놀라운 혁신이였고 점묘법이라고 불렸다. 자세히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피사체는 점으로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관객이 한 발짝 물러서서 응시하면 온전한 형태가 드러난다. 강한 붓터치가 인상주의의 특징이었지만, 쇠라의 방법은 표현과 물감 사이의 유대를 훨씬 더 유연하게 만들었다.
폴 세잔(Paul Cézanne)의 방식은 다른 동료들 보다 더 급진적인 방식이었다. 세잔의 붓을 분무기에 비유하자면, 세잔의 붓은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날카로운 모서리의 획처럼 평평한 그림 평면을 깎아내는 끌과 비슷했다. 세잔은 일반적으로 한 장면을 하나의 시점으로 구성했고 그 결과는 거의 추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세잔의 들쭉날쭉하고 겹쳐진 자국에서 입체파의 면목을 볼 수 있다.
1907년 여름에 완성된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은 입체파를 대표하는 회화이다. 피카소가 여성 혐오와 성범죄로 명성을 얻으면서 그의 유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지만, '아비뇽의 처녀들' 은 미술사의 분수령이 된 작품으로 유명함에는 틀림없다.
이 피카소의 걸작이 탄생한 계기가 된 장소는 그의 스튜디오와 파리에 있는 '트로카데로' 민족학 박물관(Musée d'Ethnographie du Trocadéro) 두 곳이다.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 작업을 시작하던 중 이곳을 방문했다가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약탈해 온 부족 가면들을 보게 되었다. 이 아프리칸 가면들을 본 피카소는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구도로 그림을 완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원래 '아비뇽의 처녀들' 은 피카소가 한때 작업실을 운영했던 바르셀로나 홍등가 거리인 보르델로를 배경으로 삼았다. 실제로 매춘부인 다섯 명의 여성 누드가 남성 고객의 맞이하기 위해 몸을 드러낸 채 행진하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피카소는 원래 두 명의 남성을 그렸는데, 둘 다 선원이었고, 한 명은 의대생이라고 노트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트로카데로를 둘러본 후 이 남성 인물들은 지워지고 세 명의 여성 얼굴은 피카소가 접했던 아프리카 가면과 비슷하게 변형하였다.
'아비뇽의 처녀들'의 색 표현은 피카소의 청색 시대에서 차용한 파란색과 장미 시대 화집에서 가져온 분홍색으로 구성되었다. 그의 색 사용 방식은 세잔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고, 더 중요한 것은 형태면에서 삼각형과 마름모꼴의 구성으로 확장하여 인물과 배경을 표현하였다. 원근감은 사라져 테이블 위에 놓인 정물화는 평평한 평면으로 보이며, 오른쪽 하단의 여인은 등을 관객에게 돌리고 고개를 완전히 돌려 그림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다.
피카소(Pablo Picasso)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작업한 해에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를 만났고, 두 사람은 이후 4년 동안 함께 큐비즘의 분석적 방법을 구상했다. 브라크는 자신의 회화가 피카소의 작품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입체파에 전념하였고 실제로 두 사람의 협업은 매우 긴밀했다.(예를 들어, 한 화가가 그린 그림은 다른 화가가 승인하기 전에는 완성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브라크는 피카소를 만나기 전에 세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풍경을 그렸는데, 1908년과 1909년 두 번의 전시회에서 이를 선보였다. 큐비즘이라는 용어는 1911년에야 제대로 등장했지만, 그 이전부터 한 비평가는 이미 브라크의 두 전시회를 모두 관람한 후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큐빅"이란 단어를 언급하며 "입방체의 기이함"이라고 명하며 입체파의 등장을 예고했다.
더 중요한 것은 브라크가 피카소보다 먼저 신문지와 벽지 조각을 캔버스에 붙이는 콜라주(Collage)를 발명했다는 점이다. 이 콜라주는 예술과 삶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최초의 역할을 하였고 향후 현대미술에서 나올 수많은 응용 전략을 제시함으로써 큐비즘 그 자체보다도 20세기 예술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사물에 대한 분석적 입체주의 이후 합성 입체주의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 두 가지 접근 방식을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색채 사용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였다.
분석적 입체주의의 경우 눈을 즐겁게 하는 것보다 눈의 시점을 다각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에 주로 차분한 갈색, 회색, 파란색으로 팔레트를 제한했다. 어떤 의미에서 합성 큐비즘은 분석주의와 더불어 색의 활기를 특징으로 더 밝은 색상이 다시 도입되고, 텍스처가 추가되었으며(콜라주가 일부 역할을 함), 구도가 더 평평해지고 단순하게 제작되었다.
동시에 로버트 들로네(Robert Delaunay), 후안 그리스(Juan Gris),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등 다른 예술가들도 입체파를 받아들였고, 1913년 뉴욕에서 열린 아모리 쇼(Armory Show)에서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ude Descending a Staircase)'는 사진 예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입체주의의 기법과 결합한 미래주의(Futerism)를 선보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큐비즘 알려지면서 이를 뛰어넘으려는 수많은 유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새로운 스타일마다 다른 스타일과 차별화할 수 있는 이론적 선언이 필요했던 '무슨 주의'가 중요시되는 시대였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이름을 딴 오르피즘은 큐비즘의 한 분파이다. 구상적 형태를 떠나 순수한 색채 형태로만, 색채와 감각을 통합하는 일종의 서정적 추상화를 추구했으며, 체코의 예술가 프란티섹 쿠프카(František Kupka), 들로네(Delaunay)와 그의 아내 소니아(Sonia) 등이 그 지지자가 되었다.
공동 창립자인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와 아메데 오젠팡(Amédée Ozenfant)이 주축이 된 순수주의는 '사물을 모든 디테일이 제거된 형태로 묘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입체파가 20세기 미술의 많은 부분을 특징짓는 회화의 해체를 시작했지만, 드 스틸(The Style)은 신조형주의라 불리며 그 방식을 구성 요소로 세분화하여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1917년 네덜란드에서 설립된 데 스틸은 회화와 함께 건축과 디자인의 활동 영역에도 포함시켰다. 본질적인 형태와 색상의 요소로 단순화하여 추상성과 보편성을 지지하고 시각적인 구성을 단순화하였다.
이 그룹에는 테오 반 도스부르그(Theo van Doesburg), 게리트 리트벨트(Gerrit Rietveld), 제이제이 피 우드(J. J. P. Oud) 등이 있었지만, 가장 유명한 멤버는 의심할 여지없이 1912년부터 1917년까지 파리에서 입체파를 이끈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이다. 이 시기에 교차하는 검은 선과 빨강, 노랑, 파랑의 블록으로 구성된 그의 작품이 대표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909년 이탈리아 시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는 파리 신문 르 피가로(Le Figaro)에 "미래주의 선언문(Manifesto of Futurism)"을 발표하여 20세기 삶의 혁명적 열정과 빠른 기술 속도를 기념하는 새로운 종류의 예술을 요구하며 필요한 경우 이를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포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마리네티의 글에는 전쟁을 "세계 유일의 위생"으로 묘사하는 등 제거주의적 수사가 열정적으로 포함되었는데, 이는 전쟁이 국가의 건강에 필수적이라는 의미였다)
마리네티의 운동은 처음에는 문학가 중심으로 진행되었지만 움베르토 보치오니(Umberto Boccioni), 카를로 카라(Carlo Carrà), 포르투나토 데페로(Fortunato Depero),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 지아코모 발라(Giacomo Balla),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 ) 등의 예술가들이 빠르게 그의 서클에 합류했다. 그러나 마리네티의 사상을 그림으로 옮기려는 초기 시도에서 그들은 그의 관념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시각적 언어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발라와 보치오니는 초기에 이탈리아의 후기 인상주의 변형인 분열주의 스타일로 그렸다.
세베리니는 1911년 파리를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입체파를 접했고, 이를 미래파로 즉시 변형시켰다. 큐비즘은 통념을 깨는 작품 스타일이었지만 주제는 여전히 비교적 정형화되고 익숙한 장르의 장면에 의존했다면, 미래주의는 기계, 자동차, 기차, 전쟁의 이미지를 도입하여 속도, 소리, 움직임과 같은 특성을 예술에 주입함으로써 피카소나 브라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방식으로 큐비즘의 중첩 구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미래파의 팔레트는 입체파에 비해 폭발적으로 화려했다.
마리네티(Marinetti)는 미래주의를 통해 정치 혁명을 꿈꾸었지만,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1917년 볼셰비키(Bolsheviks)가 권력을 장악한 후 실제 혁명에 휘말리게 되었다. 구성주의와 같은 운동은 공식적으로는 인민 소비에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활용되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후의 혁명 이전에 러시아 예술가들은 입체파와 미래주의를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종합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며, 이를 자연스럽게 큐보-미래주의라고 불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큐보-퓨처리즘은 피카소와 브라크의 형태 해체와 기계 시대의 무정부주의 정신을 예술에 불어넣으려는 마리네티의 요청을 결합하였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을 러시아화 하였고 조국에 대한 깊은 애착과 민족적 영혼에 대한 믿음을 반영하는 농민의 삶과 러시아 정교회 기독교의 주제로 파생되었다.
흥미롭게도 큐보-퓨처리즘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선구자들에게는 없었던 정신적 요소로써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이러한 형이상학적 문제를 동등한 용어로 표현할 방법을 모색한 결과였고, 이는 순수한 추상화로 형상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큐보-퓨처리즘의 또 다른 특징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미하일 라리오노프(Mikhail Larionov)와 같은 친숙한 남성 작가 외에 나탈리아 곤차로바(Natalia Goncharova), 류보프 포포바(Lyubov Popova), 올가 로자노바(Olga Rozanova) 등 여성 작가들도 참여했다.
큐비즘과 미래주의에서 차용한 또 다른 사조는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런던에서 등장한 볼티시즘(Vorticism)이다. 볼티시즘은 전위 미술 운동으로 소용돌이파 라고도 한다. 이는 미래주의와 입체주의를 종합한 성격의 운동이라 할 수 있고, 주요 선동자는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와 마찬가지로 작가이자 예술가였던 윈덤 루이스(Wyndham Lewis) 등이 참가하였다.
볼티시즘은 예술적 현상인 동시에 문학적 현상이었으며, 두 가지 측면에서 에드워드 시대 영국의 보수적인 감성에 충격을 주기 위해 공식화되었다. 실제로 단명했던 볼티시즘 저널인 '블래스트(Blast)'는 그 의도가 제목에 잘 드러나고 있다. 미학적으로 볼티시즘은 전쟁의 광기에 빠진 유럽을 반영하는 구성을 특징으로 일종의 원시적 추상주의였다. 입체파의 기하학적 조형과 미래주의의 운동감을 취하는 한편, 입체파의 고전주의적 경향이나 미래파의 인상주의적 성격을 배척하여 강한 추상적 조형세계를 창조하였다.
입체파에서 조각은 회화에 비해 뒷전이었지만 피카소 덕분에 다시 한번 20세기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피카소의 기타(1912)는 자신의 회화에서 성취했던 것을 조각에서도 실현한 작품이었다.
골판지, 꼬기, 철사로 만든 기타는 일련의 평평한 모양을 붙여 연결하여 이음새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피사체를 온전하게 표현했다. 입체파 콜라주를 물리적 공간으로 옮긴 기타는 단단한 재료 덩어리가 아니라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조립되어 조각 제작 방식에 변화를 일으켰다. 이 작품은 러시아 구성주의 운동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 구성주의 운동의 창시자인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이 1913년 피카소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기타를 본 후 피카소의 업적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고 집으로 돌아가 구리와 나무로 만든 피카소의 기법을 훨씬 더 추상적으로 변형한 '코너 부조'(Counter-Relief, 1914)를 제작하였다.
또 다른 피카소 조각품은 청동으로 견고하게 주조한 '압생트의 유리(Glass of Absinthe,1914)'로, 기타보다 더 전통적인 작품이었다. 피카소는 조각품에 실제 스푼(설탕 덩어리 위에 술을 부을 때 사용하는 납작하고 홈이 파인 도구)을 마지막 터치로 부착하였다. 이 제스처는 '발견 오브제(레디 메이드)'라는 완전히 새로운 장르의 시초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말레비치(Malevich)와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같은 개별 예술가들은 입체파의 추론을 논리적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지극히 주관적인 예술로 나아갔다. 동시에 다다, 표현주의(Expressionism), 초현실주의(SurRealism) 등 끊임없이 진화하는 미술사조가 등장하여 대중의 마음속에서 입체파가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피카소 자신도 신고전주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에서 대안을 모색하였고, 당시에는 피카소의 명성이 높아서 그림을 어떻게 그렸는지는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큐비즘은 19세기와 20세기의 짧은 기간 동안 그 자체의 성공으로 축약되었고 하나의 긴 미술사적 길을 다른 길로 연결하는데 구심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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