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팝아트를 대표하는 작가인 앤디 워홀은 예술가이면서 대중들을 몰고 다녔던 스타 작가이다. 그는 오늘날까지 팬덤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의 드라마틱한 예술과 인생에 대한 담론은 오늘날 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팝아트는 1960년대를 전후로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비슷한 시기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1950년대 전후 유럽과 미국의 앵포르멜과 추상 표현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를 지나 경제와 문화의 안정기와 풍요로워진 산업 사회에서 생겨난 새로운 유형의 미술이었다.
특히 미국은 두 차례 세계대전 직후 산업화의 성과로 다른 나라에 비해 대량 생산이 빨리 보편화되었으며, 30년대 경제 공황기를 거쳐 미국의 경제부흥으로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되었다.
매스 미디어의 발달 또한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진 대중들의 문화와 소비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팝아트는 1960년대 미국의 이러한 사회, 문화 정치 경제의 변화를 배경으로 태어난 예술이다.
1928년 공업지대인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앤디 워홀은 미국의 빠른 산업화의 과정을 경험하고 그 중심에서 삶과 대중문화의 연관성을 발견하였다. 자신의 예술적 키워드를 대중문화에서 찾아 그의 작품에 적용하였는데, 특히 불특정 대중에게 공적, 간접적, 일방적으로 많은 사회 정보와 사건을 전달하는 신문, TV, 라디오, 영화, 잡지 등과 같은 매스미디어를 활용하였다. 그는 산업화의 대표적인 대량생산 방법과 형식을 그의 작품세계에 이용하였고 이는 새로운 예술이란 형태로 알려졌다.
앤디 워홀은 필라델피아 피츠버그 카네기멜론 대학교에서 상업 예술을 전공한 후 뉴욕으로 이주하였고 잡지 삽화와 광고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워홀은 좀 더 자유로운 창작 활동이 가능하고 이보다 좀 더 유명해지고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순수 미술가를 원했다.
1950년대 후반 [딕 트레이시, Dick Tracy], [슈퍼맨, Superman]과 같은 대중적 영웅이나 성형수술 전후를 그린 [전후, Before and After]와 같은 저급한 소재의 만화적인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워홀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전시가 있는데 1962년 LA의 페루스 화랑에서 캠벨 수프 통조림을 32번 실크스크린 한 작품을 전시하여 화제가 되었다. [브릴로 상자], [하인즈 케첩 상자], [캠벨 수프 통조림], [코카콜라병] 등은 그 시대 가장 흔한 공산품이었고 워홀이 어릴 적부터 보고 먹었던 아주 일상적인 산물이었다. 이러한 일상적인 물건들이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전통적인 예술이 가진 미학과는 반하지만, 반대로 일상적인 물건들을 보는 관객들에게 고유의 기억과 감정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새로운 매력이었다.
워홀의 대표적인 작업방식은 실크스크린이다. 이 방식으로 작품이 복제되었고, 이미지의 대량생산을 위해 사용되었던 상업적인 기법이었다. 그는 작가의 전통적인 수작업 방식이 아닌 기계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예술에 관심과 흥미를 느꼈으며 또한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차용함으로 익숙함과 새로움을 동시에 표현하였다.
[5명의 죽음, Five Death]에서 보이듯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어있는 모습의 사진을 다양한 색채로 실크스크린 하여 복제하기도 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전기의자]를 아무렇지 않게 거실 안을 장식하는 그림처럼 찍어낸 작품들은 실크스크린의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워홀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이미지를 실크스크린을 통해 반전, 복사, 반복함으로 이를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건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수많은 사건 중의 하나가 되어 흔하게 지나치는 현실을 보여준다. 또한 다채로운 컬러의 조합으로 작품의 대상이나 스토리가 아닌 형태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기까지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도 이제 더 이상 어느 특별한 미술관을 가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복제물로 재 생산된 명화들은 대중문화로 변모했으며 우리에게 친숙한 대가들의 작품들이 실크스크린 방법으로 복제되었다. 색채는 바뀌었고, 수없이 복제된 이미지들은 원작의 독창적 아우라가 아닌 단순한 이미지의 복제물로 존재하게 되었다.
워홀은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Factory)이라 부름으로써 이러한 관점을 강조하였다. 그의 예술 전부를 설명해 줄 수 있다고 할 만큼 중요한 개념인 '감정이 제거된 상태의 기계적 복제 예술품" 들은 워홀의 팩토리에서 쏟아져 나왔다. 작가의 독창성이나 개성, 감정이 제거된 대량 생산의 산물로서의 예술이고 이것이 워홀이 펙토리에서 생산하고자 한 것이다. 워홀 스스로 감정이 제거된 상태의 기계가 되고자 하였고, 이는 대중문화의 획일성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 I wnat to be a mashine "
워홀은 스타들을 매우 동경했다. 그는 언제나 유명해지는 것에 관심이 쏠렸고 스타가 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스타를 그린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였다. 워홀의 메릴린 먼로 초상은 배우의 유명세만큼이나 가장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이다. 1962년 먼로의 사망 보도가 신문에 일제히 보도되었고, 워홀은 먼로의 죽음을 바로 1953년의 먼로 사진을 통해 매스미디어를 통한 환상이 지배하는 미국사회의 현실을 나타냈다. 또한 1963년 11월 캐네디가 사망 이후 그의 아내인 재키 연작을 시작하였다. 재키 연작은 1965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재키 역시 메릴린 먼로만큼이나 미국인들에게는 흠모의 대상이었다. 재키의 행복한 어린 시절, 케네디의 장례식에서의 재키 모습 등을 반복적으로 배치하여 미디어가 대중에게 불필요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만들어내는 과도한 이미지를 형상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워홀은 케네디 사망 당시 모든 미디어가 슬픔을 강요하는 듯한 획일적인 상황이 매우 불편했다고 회상하는데,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가 가진 독보적인 권력을 볼 수 있다.
워홀의 초상화 작품 중 지명수배자 13명의 초상을 그린 [지명수배자]가 있는데 이는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범죄자의 얼굴이나 스타나 캠벨 수프나 별 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워홀이 생각하는 현대사회의 미디어는 독보적인 권력의 힘으로 스타나 범죄자이든 상관없이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되도록 무차별적 반복을 강요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 범죄자들의 벽화는 논란이 일자 워홀이 알루미늄 페인트를 벽화에 뿌려 완전히 제거하였다.
워홀은 자화상 또한 그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그가 자화상을 많이 작업한 이유에는 스타가 되고 싶었던 열망이 크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마치 꾸며진 스타처럼 드러내면서 자신의 내면을 철저히 숨기고자 한 자화상을 통해 그는 스스로 예술의 대상이 되었다. 워홀은 끊임없이 자신을 스타로 만들기 위해 전략을 세웠으며 스스로 스타가 되었고 예술이 된 것이다.
워홀의 초상 작품들은 반복적이고 격자 형태로 배치되는데 이는 작품 하나의 개성을 가진 것이 아닌 대량 생산의 캠벨 수프 통조림과 같은 사물의 상태로 보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물 중심이기보다는 피상적이며 껍질로만 존재하며 양산품의 모습처럼 보이게 될 뿐이 목적이다. 그러나 워홀의 초상에는 특유의 매력이 있다. 대중이 열광적으로 환호하였으며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먼로와 재키의 초상은 타인들로 하여금 애잔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앤디 워홀은 건조한 반복적 이미지 속에 추억과 낭만을 담아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시선과 생각을 담길 바랬다.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초상이 가진 역사의 모습도 담아내게 되었다.
앤디 워홀이 이러한 작품들을 발표하였을 때 당시 그의 예술에 대한 반론이 팽배하였다. '이것이 예술인가?'
미술관에는 존재하지만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흔히 일상에서 발견되는 사물의 지루한 반복이었기에 친숙하면서도 충격이었다. 워홀은 그 어떤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을 대중화시켰다. 예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돈, 코카콜라병, 브릴로 상자, 통조림과 같은 비예술적 사물들을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였고, 예술과 일상의 간극을 좁혔다. 즉 다다와 뒤샹 이후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무한하게 확장시킨 것이었다.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사진, 영화, 잡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면서 예술과 비예술, 순수미술과 상업 디자인, 고급과 저급 예술,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를 흐리게 하였다.
워홀은 대중이 원하는 대중문화의 특성이 무엇인지 간파하였고, 객관적으로 동시대 문화를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워홀은 미디어의 대량 공세가 인간의 감정까지도 제어하는 현실, 미디어가 생산하는 환상과 리얼리티와의 간극을 직시하였고 일상적인 대상들을 선택하여 실크 스크린과 또는 사진과 같은 복제 방식과 반복이라는 형식을 통해 새로움이 제거된 기계 복제 시대에 가장 걸맞은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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