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미국 시카고에서 서양미술사와 페인팅을 전공한 나는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란 미술사조에 매료되어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을 동경하고 그들의 미학적 사고와 표현에 심취했었다. 그 당시 페인팅을 지도하던 교수들도 현존하는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다수였고, 그들은 학생들에게 예술적 사고에 필요한 방법적인 제시를 하였다. 회화에 추상을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표현 방법과 그 안에 색이 가지는 내적 표현에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개인적 견해로 미술이란 추상이 구상보다 훨씬 현대적이고 지적 추구형이며 가장 큰 범주의 표현이라 믿었다. 예술가는 자기표현이라는 생물학적인 필요를 넘어 사회적 행동의 한 형태를 회화를 통해 표출한다고 생각했다.
1945년에 끝난 2차 세계대전은 세계적으로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 개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서양 문화 발전의 근본이 되었던 이성과 합리주의 개념은 회의를 가져오게 되고 그 결과 파리에서는 반 이성주의, 비합리성, 반 전통 정신에서 거칠게 표현하는 앵포르멜 미술(Informel Art)이 생겨나게 되었고, 뉴욕에서는 추상표현주의 미술이 지배적인 경향이 되었다.
추상 표현주의의 근원은 바실리 칸딘스키(Vasilly Kandinsky)로 거슬러 올라간다. 칸딘스키는 회화의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여 대상에 감정을 싫지않고 오직 점, 선, 면, 색체라는 회화의 기본 요소만으로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1910년대 초에 감정에 의한 서정적인 추상회화 작업을 하였다. 또한 기하학적 추상으로 몬드리안(Piet Mondrian)과 완전한 추상은 아니지만 대상을 단순화 시키고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피카소(Picasso), 세잔(Cezen), 마티스(Matisse) 등의 인상주의로 이어졌다. 1910년대 다다(Dada)와 초현실주의(Surrealism)에 이르러서는 전통적인 미술에 반하여 저항하면서 인간의 무의식의 영역까지 미술의 폭이 넓어지게 되고 미술에 있어 정신적 가치는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동안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많은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뒤샹(Marcel Duchamp), 몬드리안(Piet Mondrian), 마타(Roberto Matta) 등과 같은 작가들이 추상표현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5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소위 뉴욕 스쿨에 속하는 작가들이 다양한 양식으로 작업하였고, 대표적으로 잭슨 폴락(Paul Jackson Pollock),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바넷 뉴만(Barnett Newman), 클리포드 스틸(Clyfford Still),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 등이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추상표현주의는 다양한 표현 방법으로 작업되었는데 굳이 큰 맥락으로 나눈다면 액션 페인팅과 색면회화로 대표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액션 페인팅으로는 잭슨 폴락, 거친 붓 표현의 윌리암 드 쿠닝(Willem de Koonning) 등이 주도하였고 마크 로스코, 바넷 뉴만 등으로 대표되는 색면회화이다. 액션 페인팅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Automatisme)에 영향을 받은 무의식의 표현으로 작가의 행위로 인해 표현되는 기법으로 작품에 반영되었다. 반면 색면회화는 당시의 종교적, 정신적, 명상적 가치 등을 추구하면서 색을 통하여 미학적 가치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는 추상 표현주의 대표적 화가로 그의 커다한 색면 페인팅을 바라보고 있으면 현실이 아닌 그 이상의 세계에 속하며 수용적인 관람자의 입장에서 웅대한 공간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장엄한 색면과 공간이 주는 강인함을 잊을 수 없다.
숭고(Sublimity)의 미학적 개념으로 해석되는 로스코의 작품은 숭고에 대한 개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숭고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뜻이 높고 고상하다' 또는 '아름답고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이다'를 말한다. 색으로 인한 숭고한 표현이란 극히 주관적인 정신적 프레임 안에서 본인의 가치와 색의 본질을 추구 힌다. 로스코는 자신의 회화를 통해 인간 정신적, 종교적 숭고미를 실현하고자 하였고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경외감, 흥분, 두려움 등을 지닌 보다 성숙한 감정이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위압적으로 거대한 대상에서 유발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숭고미를 거대한 화면과 장엄한 색채로 표현하여 초월적 정신세계를 추구하게 되고, 이는 로스코의 개인적 성향과 당시 시대적 배경이 상호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로스코는 1903년 러시아(지금의 라트비아)태생으로 오랜 고통의 역사를 지닌 유태인 출신이다. 그가 10살 무렵 미국으로 이민을 하게 되었고 그 당시 독일에서의 유태인 학살을 목격하면서 존재에 대한 두려움, 공포, 비극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였다. 이러한 배경에 로스코는 자연스럽게 현실의 불안과 공포를 초월할 수 있는 불멸의 정신을 추구하였으며,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예술이라고 믿었다.
로스코는 예일대를 중퇴한 20대 초반 예술계에 입문해 드로잉, 정물화, 일러스트레이션 수업을 들으며 예술가의 삶을 시작하였고, 이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는 화가 밀턴 에브리(Milton Avery)였다. 1930년대 말까지 화가로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채 자기 스타일을 구축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이어갔다. 그의 초기 작품은 뉴욕 지하철의 여러 다른 모습들을 표현하였는데 그의 지하철의 풍경은 도시 생활에서의 소외된 감정이 드러나있다. 특히 그는 예일대학시절 동기들과 잘 융화되지 못한 경험을 가지고 이민족의 외로움과 이질감을 표현하였다. 지하철 풍경은 그의 작품이 사각형의 추상으로 귀결 되는 시작점으로 보이며 사각형 형태의 구조적 틀을 지니고 있다.
1940년대 초 로스코는 유럽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유기적 생명체 형태의 회화도 작업하였다. 유기적 형태를 표현하는 호안 미로(Joan Miro)나 아쉴 고르키(Arshile Gorky)의 회화와 비슷한 화풍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로스코의 [바다 가장자리의 느린 소용돌이(Slow Swirl at the Edge of the Sea, 1944)]는 대략 1936년부터 1948년까지 지속된 로스코의 초현실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미지는 바다와 하늘 사이에 나란히 앉아있는 두 생물, 소용돌이치는 무정형 모양을 가지고 있고 자신은 유기체의 원리와 열정을 구현하지만 특정 시각적 경험에 대한 명확한 연관성은 없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바다 가장자리에 있는 두 인물은 아담과 이브와 연관될 수 있지만, 보편적인 의미에서 남성과 여성 유기체의 바로 그 원리이다. 반면 그는 두 번째 아내인 메리 엘렌(Mary Ellen)을 만난 직후에 이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개인적인 차원의 표현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의 초현실주의 시대는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지속되었다. 그 이전의 초현실주의 작가들처럼 로스코는 무의식 영역에서 영감을 얻었고 작품을 통해 현대 삶의 공포에서 벗어나 생명, 신화 및 예술의 원초적 시작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였다.
1940년대에 로스코의 작품세계는 여러 단계를 거쳐 독자적인 언어를 확립해 갔다. 구상화에서 출발하여 그의 작품은 신화 주제, 초현실주의, 다양한 화풍의 그림을 거쳐 완전한 색면 추상으로 발전하였다. 로스코는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 League)에서 아메리칸 유태인인 막스 위버(Weber Max)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나 미술의 아카데미 영향보다는 스스로 깨우쳤다고 한다. 로스코는 유기적 형태에서 점점 단순화되어 점차 색면 구성으로 단순화되어 갔다.
그는 보편적이고 초자연적인 정신성을 표현하기 위해 생물 형태적 이미지를 없애고 사각형 형태를 도입하여 1949년 두 개의 색채 사각형으로 구성된 로스코 특유의 양식에 도달한다. 로스코는 그리스 신화, 기독교적 도상 등을 소재로 삼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인물 형태들을 색채로 상징하고자 하였다. 이 스타일은 1955년 미국 미술사의 전환점을 발견하고 정의내린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에 의해 '컬러 필드 페인팅(Color-Field Painting)' 이라는 고착된 용어로 설명되었고 상당히 열린 공간과 표현적인 색상 사용이 특징이다. 뉴욕 모마(MoMA)의 전 회화 및 조각 큐레이터 윌리암 에스. 루빈(William S. Rubin)에 의하면. '로스코는 개척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색면 직사각형은 순수한 빛으로 비 물질화되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표현하였다. 로스코의 오랜 동료이자 아트 인스티튜트 오브 시카고의 전설적인 큐레이터였던 캐서린 쿠(Katharine Kuh)에 의하면 '로스코는 때때로 회의적이고 종종 호전적이었지만,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을 지니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더 큰 믿음이 있습니다. 그는 우연적인 효과에 맡기는 일이 거의 없이 강렬한 질감 그리고 특정한 색의 전체적인 면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연구한다.'라고 언급했다.
로스코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그림을 추구하였으며 슬픔과 비극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전달하려 하였다. 회화를 통해 색의 관계에만 감동되는 걸 바라지 않고 자신의 깊은 사고와 인간의 상태를 높이기 위한 내적 표현의 요점을 강조하였다. 로스코의 색채가 가지는 내적 표현은 시적이거나 비극적인 주문을 가지며 우리의 존재를 가득 채운다. 그 체험의 순간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고 색채는 우리의 의식 속에 파고들어 명상으로 마음을 움직이며 고양시킨다. 그러나 로스코가 바라는 체험의 기억에 대한 구체적인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면과 외적 표현에서 그는 모두 추상적이고 그에게 예술은 심오한 의사소통의 형태였다.
로스코는 다양한 크기와 색상의 직사각형을 색상 영역에 레이어링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면서 회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비극, 파멸, 기쁨 등 시대를 초월하는 기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려는 그의 화면은 점점 시간이 갈수록 거대해졌고, 색으로 표현되는 면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어두워졌다. 이는 로스코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자들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감각적 체험을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1968년에 로스코의 건강은 수년간의 심한 불안과 관련 음주 및 흡연 습관으로 인해 나빠졌고 이로 인해 그의 페인팅 크기와 과정이 몸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캔버스 크기를 줄이고 오일에서 아크릴 물감으로 전환하기도 하였으나 1970년, 66세의 나이에 만성적인 우울증과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인간 존재의 유한함에 절망을 느껴 자살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사각형 회화는 생을 마감하는 해까지 점점 컬러가 심오해지고 어두운 표면과 강렬한 레드로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마크 로스코는 전후 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자연과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 그림을 크고 생생한 색채로 대체하여 공간적 깊이와 명상력으로 관람자가 작품과의 대화에 참여하게 하였다. 비극적 경험이 예술의 유일한 원천인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을 존재의 기본 조건으로 만들려고 했고 이를 추상으로 승화시켜 현대 미술의 선구자로서 그 중요성과 가치를 널리 인정받았다.
참조:
2017년 독립 미술사가이자 작가 인 Karen Kedmey의 소개
마크 로스코, 아니 코엔 솔랄 지음/ 여인혜 옮김, 2015, 다빈치
https://www.wikiart.org/en/mark-roth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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