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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Part1: 1890s-1920s)

예술

by rooun 2023. 4. 15.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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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in his studio, 1920s. HULTON ARCHIVE/GETTY IMAGES

 

2023년 올해는 파블로 피카소가 1973 4 8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세기 예술의 거장, 모더니즘을 탄생시킨 인물, 슈퍼스타 예술가의 표본을 만든 피카소의 명성은 모두가 공감한다.

이 명성과 달리 여성 혐오자, 성적 가해자로서 실제 그의  사생활은 이 화려한 명성을 무색하게 할 수도 있었다. 심한 여성 편력과 당시의 기준으로 여성에 대한 그의 견해는 거칠게 다룰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를 기념하는 업적은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그러한 예술가의 사적인 삶은 고의적으로 무시되어 왔다. 또한 여성이란 피카소의 삶에서  뮤즈이자 그를 매료시키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 피사체로서 그의 예술에 큰 역할을 했다.

 

피카소는 1881 10 25일 스페인 남부 도시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호세 루이스 블라소와 어머니 마리아 피카소 로페즈의 이름을 따서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라고 불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카소는 중간 이름을 버리고 천재의 대명사가 된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Picasso's father, painter José Ruiz y Blasco, Málaga, Spain, 1870. Photo  :  Picasso Museum, Paris/Wikimedia Commons

 

말라가 미술대학의 미술 교수이자 지역 박물관 큐레이터였던 피카소의 아버지는 조류 연구, 특히 비둘기 연구로 유명한 화가였기 때문에 어린 파블로는 아버지의 영향 아래 어릴 때부터 또래를 뛰어넘는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난독증(당시에는 진단명은 없었다) 증세로 공부에는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못했다

 

그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벌칙으로 교실에서 쫓겨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공책에 스케치를 하였다. 피카소가 때때로 그림을 거꾸로 그리는 등 읽기 장애가 그의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장애가 시각적으로 예리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피카소는 아버지로부터 그림과 회화 교육을 받았으며, 11세에 1892년 가족이 이주한 스페인 라코루나에 있는 미술 응용 예술 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뛰어났고, 13세 때 그는 첫 유화 작품을 제작하여 전시 및 판매도 시작했다.

 

 

바르셀로나 

 

1895년 피카소의 가족은 일곱 살 난 여동생 콘치타가 디프테리아로 사망하는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된다. 그 후 가족은 피카소의 아버지가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바르셀로나로 이주했고, 아버지는 입학 위원회를 설득하여 아들이 미술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했다. 피카소는 보통 한 달이 걸리는 과정을 일주일 만에 마칠 수 있었으며, 14살의 나이에 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피카소는 바르셀로나에서 성장했고 또한 고향으로 여기게 되었다. 피카소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즐겨 찾던 아방가르드 서클인 엘스 콰트레 가츠(Els Quatre Gats, 네 마리의 고양이)라는 카페/바에서 현지 아방가르드 서클과 잘 어울렸다.

 

 

마드리드

 

1897년 피카소의 아버지와 삼촌은 16세인 그를 스페인 최고의 명문 미술 학교인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시켰다. 피카소는 수업에 충실하지는 않았다. 대신 프라도 미술관과 스페인 수도 곳곳에 있는 거장들의 작품에 빠져들어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베르메르에 심취했고, 특히 카라바조와 엘 그레코에 매료되었다. 특히 후자는 젊은 예술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실제로 엘 그레코의 '성 요한의 비전'(1608~14)의 구도는 10년 후 피카소가 그리스 거장에게 빚을 진 여러 피카소 작품 중 하나인 '아비뇽의 여인들'(1907)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초기 페인팅

 

피카소의 야망은 자연스럽게 그를 파리로 이끌었고, 1900년 그는 친구이자 동료 예술가이자 동포인 카를레스 카사게마스(Carles Casagemas)와 함께 두 달간 파리로 여행을 떠났다. 피카소는 그곳에서 만든 작품 중 하나인 '물랭 드 라 갈레트(1900)'에서 벨 에포크 시대의 유흥 장면에 어두운 키아로스코 장막을 씌워 술집에 모인 군중에게 스페인풍의 음울한 분위기를 더했다.

 

물랭 드 라 갈레트 (1900)

 

인물과 얼굴이 흐릿하게 처리되어 배경에서 춤을 추는 군중과 왼쪽 하단에 전경으로 배치된 세 명의 앉은 여성에게 스펙터클한 느낌을 준다. 프레임 밖으로 거의 잘려나간 여성 중 한 명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고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화면 밖의 누군가를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다. 이 여인은 친구인 카사게마스가 권총을 머리에 겨눌 정도로 열렬히 짝사랑했던 모델 제르맹 가르갈로다.

 

Pablo Picasso, Ángel Fernández de Soto and Carles Casagemas, Barcelona, c.1900. Photo  :  Eduard Vallès Archive, Barcelona

 

피카소는 관자놀이의 총상이 선명하게 보이는 죽은 친구의 클로즈업 초상화 '죽은 카사게마스' (1901)를 통해 카사게마스의 절망적인 행동을 불멸의 명작으로 남기기도 했다. 가르갈로는 훗날 피카소의 내연녀가 된다.

 

죽은 카사게마스 (1901)

 

파리

 

Jean Cocteau, Manuel Ortiz de Zárate, Henri-Pierre Roché, Marie Vassilieff, Max Jacob, and Picasso. Montparnasse, La Rotonde, 1916. Photo  :  Fine Art Images/Heritage Images via Getty Images

 

 

그 후 몇 년 동안 피카소는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파리를 옮겨 다니다가 1904년 파리에 영구적으로 정착하데 되었다. 이 시기에 시인이자 예술가인 막스 야콥(Max Jacob, 1876~1944)을 만났고, 두 사람은 피카소의 인생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 관계 중 첫 번째 관계를 맺었다.

 

야콥은 프랑스계 유대인으로 동성애자였으며, 나중에 파리 외곽의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야콥은 피카소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고, 둘은 볼테르 대로에서 같이 지내며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고, 때로는 따뜻함을 위해 그림을 불태우기도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야콥이 피카소를 시인이자 미술 평론가인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소개해 주었고,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와 현대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너십을 맺게 되는 화가 조르주 브라크를 소개해 주었다.

 

야콥, 아폴리네르, 브라크는 카리스마 넘치는 스페인인 피카소를 중심으로 뜻을 같이하는 예술적 반항아들의 모임인 '라 반드 드 피카소'의 핵심을 형성하였다. 피카소가 유명한 라팽 애자일 카페 밖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독일인 무리의 머리에 권총을 발사한 사건처럼, 이 그룹은 난폭함과 공공장소에서의 예의를 무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1911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가 도난당했을 때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는 도난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용의자로 간주될 정도로 라 밴드의 무정부주의적 명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카소의 작품은 처음부터 주목을 끌었는데, 피카소가 파리에서 그린 초기 그림은 상징주의의 몽환적인 느낌과 함께 현대의 삶을 담고 있다.

 

블루 시기

 

Pablo Picasso in 1904. Photo  :  Apic/Getty Images

 

 

카사게마스의 죽음 이후 피카소는 1901년에서 1904년 사이에 완성한 청색기의 그림에서 팔레트를 거의 단색에 가까운 구성으로 줄이며 진정으로 성숙한 스타일을 선보였다. 피카소는 나중에 "카사게마스의 죽음을 알게 되면서 파란색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라고 회상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당시 가난으로 인한 우울증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피카소는 경력 초기에 자신의 소외감을 반영하여 거지, 죄수, 매춘부, 맹인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소재로 삼았고, 가톨릭 상징주의가 담긴 작품을 그렸다. 피카소는 몇 년 후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했던 것처럼 영감을 얻기 위해 현장도 직접 경험하기도 했다. 또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여자 교도소 병원을 방문한 피카소는 다소 낙담한 표정의 수녀 두 명을 묘사한 '수녀들'(1902)은 엘 그레코의 약화된 형상과 인간에게 푸르스름한 색조를 부여하는 경향을 표현하였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제목의 인물이 몰입의 무게로 인해 악기 위로 구부러진 것처럼 보이는 '늙은 기타리스트'(1903)와 같은 청색 시대의 아이콘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늙은 기타리스트, 1903

 

장미 시대

 

1904년 피카소는 빨강, 주황, 분홍색이 주를 이루며 파란색, 노랑 황토색 등을 사용했기 때문에 장미 시대로 불리다. 내용적으로는 서커스 단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대신해 등장하고, 피카소가 색채와 주제 면에서 밝게 변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곡예사, 광대, 공중곡예사들은 대체로 암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서커스는 전통적으로 사회 부적응자들의 안전한 피난처 역할을 했기 때문에 피카소의 '푸른 시대' '장미 시대'의 차이는 종류보다는 정도의 문제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피카소는 청색기의 우울한 색채를 배제했지만 장미기의 그림에는 엘 그레코의 길쭉한 해부학적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피카소는 '말을 이끄는 소년'(1905)에서 말 옆을 걷는 누드 또는 옷을 거의 입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는 '성 마틴과 거지'(1597-99)의 한 페이지를 가져왔다.

 

말을 이끄는 소년, 1905
엘 그레코, 성 마틴과 거지, 1597-99

 

피카소가 서커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브라크와 함께 서커스 메드라노를 자주 관람한 데서 비롯되었다. 장미 시대 장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은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캐릭터 할리퀸으로, 독특한 다이아몬드 무늬 의상으로 유명한 그는 '살림반크의 가족' '할리퀸의 가족'(1905) 같은 작품에 등장한다.

 

피카소의 장미시기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그의 정서 상태가 개선된 시대임에는 틀림없다. 피카소가 파리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스튜디오를 몽마르트르에 마련한 것(훗날 피카소가 회상하길, 이곳이 그가 진정으로 행복했던 유일한 장소였다고), 그리고 7년간 질투로 점철된 격동의 관계를 맺었던 프랑스 화가이자 모델인 페르낭 올리비에와의 관계가 시작된 것 등 두 가지 사건이 그의 인생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그녀는 피카소가 그녀를 그린 60여 점의 초상화에서 알 수 있듯이 피카소의 뮤즈 역할을 한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다.

 

1906년: 전환의 해

Gertrude Stein poses in front of Picasso's 1906 portrait of her in her Paris apartment, n.d. Photo  :  AFP via Getty Images

 

Gertrude Stein portrait

 

1906년 피카소는 미국 국적의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1874~1946)의 초상화와 팔레트를 손에 든 부드러운 얼굴의 젊은 예술가인 자신의 초상화 두 점으로 장미 시기를 마무리한다. 자화상 속 스타인은 사색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으며,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다. 사실 이 두 그림은 그의 예술적 방향과 개인적 운명에 전환점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스타인은 소설가, 시인, 극작가이자 피카소에게 가장 중요한 아방가르드 미술품의 열렬한 수집가였다. 피츠버그 인근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녀는 피카소의 주요 후원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덕분에 피카소의 생활은 크게 개선되었다.

 

스타인은 오빠 레오와 함께 아파트를 공유하며 매주 유럽과 미국의 유명 예술가 및 작가들이 참석하는 살롱을 열었다. 피카소는 1905년에 스타인을 만났고, 피카소가 존경한 몇 안 되는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지적으로도 뛰어난 스타인은 피카소와 역사에 남을 야망을 공유했으며, 물론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다.

 

 이 무렵 피카소는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 팬트리를 거침없이 습격하는 성향이 분명해졌다. "좋은 예술가는 빌리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아비뇽의 처녀

 

1907년 여름에 완성된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현대 미술의 우화(寓畵)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두 곳에서 탄생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피카소의 스튜디오와 파리의 트로카데로 민족사 박물관이다. 피카소는 '레 드모아젤'을 작업하던 중 박물관을 방문했다가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몰수한 부족 가면들을 보게 된 덕분에 '레 드모아젤'은 피카소가 계획했던 그림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레 드모아젤'은 피카소가 한때 작업실을 운영했던 바르셀로나의 홍등가 거리에 있는 보르델로를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에는 다섯 명의 여성 누드(그중 한 명은 페르낭 올리비에를 모델로 한 것임), 즉 매춘부들이 손님을 위해 몸을 흔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피카소는 원래 이 작품에 두 명의 남성을 포함시켰는데, 그러나 피카소가 트로카데로를 둘러본 후 그들은 지워졌고, 세 여인의 얼굴은 피카소가 접한 의식의 유물과 비슷하게 변형되었다.

 

'레 드모아젤'의 팔레트는 피카소의 청색과 장미 시대의 색조를 결합한 반면, 물감을 다루는 방식은 세잔에게 영향을 받았다. 더 중요한 것은 피카소가 세잔의 붓놀림을 삼각형과 마름모꼴의 구성으로 화면을 정의했다는 점이다. 원근감은 사라졌고 테이블 위에 있는 정물화는 이미지 하단에 평평한 평면으로 나타냈으며 오른쪽 하단의 복면을 쓴 여인은 머리를 불가능한 각도로 비틀면서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다.

 

아프리카 시대

 

'아비뇽의 처녀들'은 최초의 입체파 그림으로 여겨지지만, 피카소가 1909년까지 지속된 아프리카 시대로 알려진 작품에 처음 진출한 것은 이 작품이었다. 피카소는 트로카데로를 방문한 것 외에도 '아비뇽의 처녀들'을 작업할 무렵부터 아프리카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이 그림이 완성된 후 3년 동안 더욱 아프리카적인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중에는 자신의 모습을 포함한 초상화와 여성 누드화도 포함되어 있다. (그 당시 피카소뿐만 아닌 마티스 등 문화 제국주의의 예술가들은 아프리카 사물에 매료되었고, 그들의 예술에 반영하였다). 그러나 1909년에 이르러 피카소가 친구 브라크의 만남으로 다시 한번 접근 방식을 바꾸면서 아프리카 예술이 피카소에게 끼친 명백한 영향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피카소와 브라크

 

조르주 브라크(1882-1963)는 파리 근교의 아르장테유에서 태어났지만 노르망디 해안의 항구 도시 르아브르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직업이 집안의 화가이자 장식가였다. 브라크는 저녁에는 미술을 공부했고, 결국 파리의 아카데미 훔베르트에 진학하게 된다. 기질적으로 피카소와 브라크는 정반대의 성격이었지만, 피카소의 변덕스러운 성격과 부라크의 내성적인 성격이 혼합되어 분석적 입체주의라는 예술사적 결합을 만들어 냈다.

 

입체파의 탄생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해, 브라크는 피카소가 있는 바토 라부아르에 방문했다. 브라크는 야수파에 속해 있었지만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아 피카소와 함께 향후 4년간 '아비뇽의 처녀들'의 비유를 습득하며 분석적 큐비즘을 시작하게 된다. 

 

두 예술가는 한 예술가의 그림이 다른 예술가의 서명을 받기 전까지는 완성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을 정도로 공동 작업에 전념했다. 그러니 두 사람의 캔버스가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해지거나 브라크가 두 사람의 협업을 "서로 밧줄로 묶인 산악인"에 비유한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주로 정물화에 집중한 피카소와 브라크는 거의 추상화에 가까워지면서 인물과 사물을 동일한 구도적 지층을 차지하는 평면적 구성으로 축소하여 깊이에 대한 인식을 제거했다.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동시에 묘사했으며, 종종 피사체 위나 주변에서 시선의 움직임을 암시하기 위해 패턴을 바꾸는 방식으로 묘사했다. 입체파는 특정 유리한 지점에서 사물을 정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보는 운동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브라크가 캔버스에 신문지와 벽지 조각을 붙이는 콜라주를 발명했다는 점이다. 트롱프뢰유 장르에 대한 일종의 메타 코멘터리인 이 단순한 제스처는 예술과 삶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미래에 수많은 작업 기법을 선동함으로써 20세기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합성 큐비즘

 

Pablo Picasso c. 1930, with his painting Still Life: Guitar, Newspaper, Glass, and Ace of Clubs (1914) in the background. Photo  :  AFP via Getty Images

 

 

1914년 피카소와 브라크는 분석적 입체파의 잠재력을 모두 소진하고 합성 입체파라고 불리는 변형된 방식으로 전환했다. 두 접근 방식을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두 접근 방식은 크게 달랐다.

 

분석적 입체주의의 경우, 눈을 즐겁게 하는 것보다 눈을 재교육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주로 차분한 갈색, 회색, 파란색으로 팔레트를 제한했지만 합성 큐비즘은 더 밝은 색상이 도입되고 텍스처가 추가되었으며(콜라주가 일부 역할을 함) 구도가 더 평평해지고 단순하게 되었다.

 

피카소와 조각

 

Picasso in his studio, Paris, 1922. Photo  :  Albert Harlingue/Roger-Viollet/Getty Images

 

 

피카소는 그림으로 유명하지만 20세기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조각 작업도 병행하였다. 1909년에는 아프리카 시대와 분석적 입체파의 중간 스타일로 페르낭 올리비에의 초상 흉상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점토로 만들어 조각 기법 측면에서는 상당히 전통적인 작품이었다. 흥미롭게도 피카소는 조각가로서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이는 선입견이 없는 조각을  작업하기에 더욱 좋은 조건이었다. 그래서 1912, 그는 '아비뇽의 처녀들'이 회화에서 했던 평면적 구상을 조각에서도 할 수 있는 '기타'를 만들었다.

 

골판지, 노끈, 철사로 만든 '기타'는 일련의 평평한 모양을 붙이고 이어 붙여 마치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피사체를 전체적으로 표현했다. 큐비즘을 물리적 공간으로 옮겨온 기타는 단단한 재료가 아닌 부품을 조립하여 조각 제작 방식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기타, 1912

 

마찬가지로 '압생트의 유리'(1914) 또한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이 작품은 청동으로 견고하게 주조되었지만 피카소는 마지막에 실제 압생트 스푼(전통적으로 술을 따르던 설탕 덩어리를 담는 납작한 홈이 있는 도구)을 부착했다. 이 제스처는 결국 파인드 오브제 아트(found-objet art) 또는 레디메이드(ready-made)라는 장르를 탄생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압생트의 유리, 1914

 

 

1920년대 초, 피카소는 한 시대의 끝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 사이에 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갱단과 함께 몽마르트르를 뒤엎던 경솔한 반항아가 아니었고, 당시의 주요 친구들도 모두 떠났다. 서부 전선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아폴리네르는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고, 야콥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루아르 계곡의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떠났다.

 

세명의 음악가, 1921

 

피카소는 입체파의 걸작 '세 명의 음악가'(1921)를 통해 이들의 부재를 불멸의 작품으로 남겼다. 한 쌍의 콜라주와 유화 캔버스로 구성된 세 명의 음악가는 피카소가 기타를 연주하는 할리퀸으로, 아폴리네르는 할리퀸의 단역인 피에로가 플루트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야곱은 악보를 들고 수도사 복장을 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장미 시대의 코미디 델 아르테 테마로 돌아가는 신호탄이 되었다.

 

20년 동안 피카소는 예술을 완전히 변화시켰고, '세 명의 음악가'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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